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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고흐전을 보기위해 서울시립미술관을 갔는데,
관객들이 너무 많아, 그저 표만 끊고, 미술관 앞에서 사진 몇컷
찍고, 돌아왔다. 표는 미리 사더라도 전시회가 끝나기
전까지만 이용해주면 된다고 해서.

그렇게 시간은 흘러, 더이상 미룰수가 없어 어제 드디어 고흐전에 다녀왔는데,
역시나 일찍 출발하려고 했던 계획은 우리의 게으름 덕분에,
사람 많은 시간에 도착하게 되었다.

범준이가 차에서 잠이 드는 바람에, 주차장에서 잠시 모든 식구가 잠을 챙했다.
약간 잠이 덜깬 범준이를 데리고, 전시장으로 들어갔는데, 역시나 사람이 너무
많았다. 다행히 아이가 있어서 줄을 서지 않고,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 전시장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전시장은 전시된 그림들을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보고 있어서
더운 공기와 기다림의 시간이 맞물려 다소 짜증이 밀려왔다.
게다가 아이에게는 더욱 그런 공간이 싫었던지, 범준이는 자꾸 다른곳으로
가자고 보챈다. 들어가서 몇 발자국 옮기기가 무섭게, "엄마, 다 봤어, 딴데가"라고
해서 결국 그냥 그림들만 쭉 훑어 보고, 결국 '반고흐' 판매용 책자 하나 달랑 산 뒤,
사진 몇컷으로 전시회는 마무리 되었다.

나의 관심사가 남편과 아이의 관심사가 절대 될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새로운 환경에 자꾸 노출되다 보면, 언젠가는 익숙해 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게다가 문화란, 예술이란 결국 특정 부류만이 즐길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고,
우리네 일상이요,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것이 나의 기본 배경이 깔려 있기 때문에,
있어 보이기 위함도 아니고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체험의 일종이다.

외국에 가더라도, 외국 문화를 안다는 건, 박물관과 미술관등을 둘러 봄으로써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캐나다에서도 미국에서도
이런 곳을 둘러볼 기회가 생기면 꼭 한번씩 가보곤 했다.

오히려 외국에서의 이런 기회는 꼭 챙기면서,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것들에 대해 많이 놓치고, 별 관심없이 지나치곤 한다.

앞으로는 종종 시간 내서,
전시회든 어디든 좀 다녀보리라.
근데, 남편과 범준이도 즐거운 일이 되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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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전을 다녀와서

반고흐, 세상에 많이 알려진 것만큼 유명세를 톡톡히 한다는 건,
전시회장에서만도 쉽게 느껴진다. 미술관을 가득 메운 사람들,
하지만 정작 나는 반고흐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는 네델란드에서 태어났고, 가난한 천재 화가 였고,
그리고 정신병을 갖고 있었다는 것, 또한 그의 작품은
강렬한 색채 때문인지 강한 인상을 남기고, 그래서
그의 작품인지 쉽게 알 수 있다는 점, 이게 내가 알고 있는 전부다.
참, 고갱과 작업을 같이 하던 중, 귀를 잘랐다고 한다.

이번전시에서는 그의 아주 유명한 작품들은 많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그가 그린 작품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다는 점이 전시회를 다녀온
의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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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3월 30일 프로트 준데르트에서 출생하였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80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할 때까지 화상점원, 목사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였다. 마침내 브뤼셀·헤이그·앙베르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언제나 노동자·농민 등 하층민 모습과 주변생활과 풍경을 담았다. 초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1885)은 이 무렵의 작품이다. 1886년 화상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동생 테오를 찾아서 파리에 나온 고흐는 코르몽의 화숙(畵塾)에서 베르나르와 툴루즈 로트레크를 알게 되었다.

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 판화에 접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렘브란트와 밀레풍(風)의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뀌었으며, 정열적인 작품활동을 하였다. 자화상이 급격히 많아진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곧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1888년 2월 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서 프랑스 아를로 이주하였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약 2년 반이야말로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 그는 그곳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였으며 《아를의 도개교(跳開橋)》 《해바라기》와 같은 걸작을 제작했다.

한편 새로운 예술촌 건설을 꿈꾸고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그곳으로 올 것을 끈질기게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고갱과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성격차이가 심하여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해 12월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그 후 고흐의 생활은 발작과 입원의 연속이었으며, 발작이 없을 때에는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려댔다. 발작과 그림 제작에 지쳐 파리 근교 오베르에 있는 의사 가셰에게 찾아간 것은 1890년 5월이었다. 한때 건강회복으로 발작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듯하였으나 다시 쇠약해져 끝내 권총자살을 하였다. 그의 유작은 매우 많다.

지금은 온 세계가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의 정열적인 작풍이 생전에는 끝내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가 위대한 화가라는 인상을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준 것은 1903년의 유작전 이후였다. 따라서 그는 20세기 초의 야수파 화가들의 최초의 큰 지표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네덜란드에 가장 많이 있는데, 40점 가까운 자화상 이외에도 《빈센트의 방》《별이 빛나는 밤》《밤의 카페》《삼(杉)나무와 별이 있는 길》 등이 유명하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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